묵주기도의 고통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여정을 다섯 가지 장면으로 묵상하는 부분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수난 신비에 큰 비중을 두며,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의 길 등 전례 안에서 이 순간들을 깊이 되새겼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자 우리의 구원의 원천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는 이 수난의 몇 장면을 특별히 선택하여 신자들이 마음 속에 묵상하고 되새기도록 초대합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고통의 신비는 신자로 하여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 아래에 서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심연에 들어가 그 생명 주는 능력을 체험하도록 도와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각각의 신비를 성경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고, 묵상을 위한 해설과 기도 및 성인들의 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제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

관련성경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교의적 배경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의 잔을 받아들이시며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두 본성—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느님—가 만나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주신 새 계약의 잔을 겟세마니에서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받아들이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명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이 순명의 기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는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보여준 불순종의 “아니오”를 거꾸로 돌려 놓는 구원사의 전환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예”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에 떨어진 이후 잃었던 순종의 길로 다시 초대되었습니다. 교부들은 겟세마니의 예수님을 두고 “두 의지가 싸우는 겟세마니의 투쟁”이라고 부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영적 전쟁이 바로 이 순간 이루어졌다고 해석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시고, 타락한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려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께 완전히 굴복시키신 것입니다.
깊이 있는 묵상을 위한 안내
이 신비를 묵상할 때 우리는 올리브산의 어둠 속에서 외롭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곁에 함께 서도록 초대됩니다. 제자들은 슬픔과 피로로 잠이 들었지만, 예수님은 홀로 깨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고통과 두려움의 잔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정직하게 우리의 바람을 아뢰고,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며 받아들일 마음을 청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고뇌에는 우리 각자의 죄와 고통까지도 짊어지고자 하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때때로 삶의 시련 앞에서 “피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게 되더라도,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순종하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봅시다. 겟세마니는 단순한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이 클수록 더욱 간절히 아버지께 매달리셨습니다. 우리의 고통도 기도로 승화시킬 때,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위로의 천사가 함께할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의 어려움에서 도망치기보다, 그 자리에서 땀 흘리며 기도했던 예수님을 떠올리며 믿음의 결단을 내려봅시다.
묵상을 돕는 기도
주님, 외로이 고뇌하던 겟세마니에서 저희를 위해 끝까지 순명하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제가 두려움에 싸일 때에 주님의 기도를 함께 바치게 하시고, 제 뜻보다 아버지 뜻을 신뢰하는 은총을 내려 주소서.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주님처럼 깨어 기도하며 아버지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성인의 말씀 및 신앙의 모범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겟세마니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슬퍼하시며 고통당하십니다. 그분의 성혈(聖血) 방울이 땅을 적십니다. … 우리 인간들의 죄악의 무게가 그분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며, 영혼이 느끼는 극심한 번민까지도 체험하셨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를 비롯한 교부들은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연약함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외아들 하나는 두셨지만, 고통 없는 자녀는 하나도 두지 않으셨다”는 격언처럼, 성자 예수님조차 인간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의 피땀은 우리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연대를 나타냅니다. 우리도 삶에서 겟세마니와 같은 순간을 맞이할 때,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고통을 기도로 봉헌하고 순명의 길을 택하도록 힘씁시다.
제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

관련성경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요한 19,1) 예수님께서는 죄없으신 분이지만, 잔인한 형벌인 채찍질을 당하시며 온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교의적 배경
로마 병사들의 채찍에 맞아 살이 찢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었다. 그가 받은 매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받은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라고 예언했습니다(이사 53,5). 예수님의 채찍 고난은 곧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는 고통의 종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대속(代贖) 제사로 가르치며, 채찍질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고통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는 사랑의 행위였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았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시며, 자신의 고통을 통해 인류를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훗날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 위에서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지셨습니다… 그분의 채찍 자국으로 여러분은 나았습니다”(1베드 2,24) . 이는 예수님의 채찍 고난이 곧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 은총의 원천임을 교의적으로 뒷받침합니다. 죄 없으신 어린양 예수께서 매맞으실 때,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동시에 드러납니다. 곧, 하느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 형벌을 치르셨지만, 그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흠 없는 어린양 예수님이었습니다 . 이러한 대속의 신비를 통해 우리의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열렸고,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로 치유되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깊이 있는 묵상을 위한 안내
처절한 채찍질 장면을 떠올리며, 우리는 죄의 심각성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면하게 됩니다. 죄인이 받아야 할 벌을 무죄한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받아내시는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의 양심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병사들의 채찍이 휘둘러질 때마다 예수님의 살이 찢겨 나가고 피가 흐릅니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죄로 가득 찬 우리의 육체 때문에, 죄 없으신 분의 순결한 몸이 찢겨 나간다”고 표현했습니다 (고통의 신비 · 거룩한 묵주기도 · escriva.org). 예수님의 몸이 털깎이는 어린양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어 땅에 쓰러졌을 때 (고통의 신비 · 거룩한 묵주기도 · escriva.org), 하느님이신 그분의 겸허와 인내는 극에 달합니다. 우리는 그저 말없이 그분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의 신비 · 거룩한 묵주기도 · escriva.org). 이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와 속죄의 마음을 일으키게 합니다. 나의 죄가 없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매를 맞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통회가 솟구쳐야 합니다. 동시에,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와 감동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매질이 끝나자 온몸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지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아마 조롱했겠지만, 하늘에선 천사들이 떨며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잠시 세상의 소음을 멈추고, 침묵 가운데 채찍 맞은 예수님을 응시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속삭여 봅시다. “주님, 제 죄를 용서하소서. 주님이 대신 받으신 그 고통을 잊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상처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영적 치유의 약이 됩니다. 그분의 채찍 자국을 통해 우리 영혼의 문둥병이 낫고, 죄로 인한 상처가 아물 수 있음을 믿으며, 겸손히 그 은총을 청합시다.
묵상을 돕는 기도
주님, 채찍에 맞으시면서까지 제 죄를 씻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의 상처가 깊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하게 하소서. 죄에 민감한 양심을 주시어, 사소한 잘못에도 쉽게 안주하지 않고 회개의 채찍으로 제 자신을 단련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신 주님의 몸을 바라보며, 남은 제 삶을 거룩하게 살 결심을 굳게 다지게 해주소서. 아멘.
성인의 말씀 및 신앙의 모범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채찍질 신비를 묵상하며 이렇게 권고합니다. “당신과 나는 말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으며,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말없이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오래도록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고통의 신비 · 거룩한 묵주기도 · escriva.org) 우리가 할 말 잃을 만큼, 주님의 고통은 처참하고도 숭고했습니다. 성 알폰소 리구오리는 그의 저서에서 “예수님의 상처 하나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씻어주는 사랑의 샘물”이라고 표현하였고, 우리가 지은 죄를 생각할 때마다 그 상처에 입을 맞추듯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성녀 가타리나 시에나는 환시 중에 “주님의 살이 찢길 때마다 당신의 마음도 함께 찢어진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많은 성인들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고통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도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순교의 삶을 선택했고(2코린 11,23-25 참조),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고백했습니다(2코린 4,10). 우리도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작은 고통 하나도 주님의 채찍 자국에 결합시키며 바칠 줄 아는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합시다.
제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

관련성경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요한 19,2-3) 병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조롱하며 머리에는 가시로 된 관을 씌우고 몸에는 누더기 같은 자주색 겉옷을 걸쳤습니다.
교의적 배경
가시관은 인류의 죄로 인한 고통과 조롱의 상징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범죄한 후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창세 3,18).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바로 죄의 저주를 친히 뒤집어쓰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부들은 “아담의 죄로 돋아난 가시를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이마에 쓰심으로써, 우리 죄의 가시를 뽑아내셨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조롱과 모욕은 그분의 겸손과 온유를 극명히 드러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시지만 인간들에게 모욕당하실 때에 아무런 답변도, 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예언했고(이사 53,7),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이 가시관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세상의 권력과 완전히 다름을 배웁니다. 인간 군주는 화려한 황금 왕관을 쓰지만, 우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가시로 된 왕관을 쓰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받으신 가시관과 자주색 조롱 옷을 두고 “보라, 이 사람이오!”(요한 19,5)라는 말로 묘사합니다. “보라, 사람이다!” 조롱 섞인 이 말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곧 사랑과 진리를 위해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남이 아닌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악을 이겨내는 사람이 참 인간이라는 진리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은 동시에 영광의 관으로 변화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 없이 부활의 영광도 없음을 가르치기에, 십자가와 부활을 파스카 신비로 항상 함께 묵상합니다. “우리는 가시관을 쓰신 임금 없이는 영광의 왕관도 없다”는 진리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랐을 때, 성 요한 묵시록은 그분의 머리에 “많은 관들”이 씌워져 있음을 봅니다(묵시 19,12). 이는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높임받으셨음을 상징합니다 (필리 2,8-9 참조). 가시관의 굴욕은 곧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 속죄와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뀐 것입니다.
깊이 있는 묵상을 위한 안내
조롱과 모욕 속에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음에 그려 봅시다. 머리를 찌르는 가시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에는 원망이나 분노가 아닌 자비의 눈물이 맺혀 있었을지 모릅니다. 군중은 “유다인의 왕”이라며 비웃었지만, 사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참된 왕이심을 선언하는 역설적 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모욕의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왕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는 사랑의 왕,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낮추시는 섬김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작은 모욕이나 비난에도 쉽게 분노하고 맞서 싸우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교만과 분노를 내려놓아 봅시다. 주님은 침 뱉음과 뺨 맞음까지 당하시면서도 “폭행을 당하셨으나 참으셨고, 입을 열지 않으셨다”(이사 53,7)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깊은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것은 오직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 너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치욕도 달게 받겠다.” 예수님의 침묵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 때문에 세상에서 조롱받거나 오해받을 때가 있습니다. 또는 억울한 비난을 받을 때도 있고, 선을 행하고도 오히려 손가락질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시관 쓰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멸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광임을 깨달으십시오. 성인들은 종종 “모욕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고, 오히려 굴욕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삶에서 찾아오는 크고 작은 굴욕을 피하기만 하지 말고, 때로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모욕을 참아내는 용기를 달라고 청합시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천상의 평화와 겸손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묵상을 돕는 기도
주님, 온갖 모욕과 수치를 참아 내신 임금이시여, 제가 교만과 허영의 왕관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가시관을 쓸 용기를 주소서. 세상 영광을 좇기보다는 겸손의 길을 걸으며, 모욕 중에도 침묵하신 주님을 본받아 제 작은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제가 받는 상처와 비난을 제 영혼을 정화하는 가시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주님께서 받으신 가시관의 아픔을 기억하며, 다른 이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삼가게 하시고 언제나 겸손과 온유의 왕이신 주님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성인의 말씀 및 신앙의 모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세상 왕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주님께서 가시관을 쓰셨는데 내가 어찌 금관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 가시관을 쓰셨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세속적 영광을 멀리했습니다 . 성녀는 남편을 여읜 뒤 궁궐을 떠나 가난한 이들 속에서 봉사하며 살았는데, 이는 가시관의 주님을 따른 삶의 한 예입니다. 또한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야, 사람들이 너를 업신여기고 미워하며 쫓아낼 때 기뻐하여라. 그때 비로소 너는 나와 함께 왕관을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가시관을 썼고 너는 생명의 관을 쓰게 되리라.” 이 일화에서 보듯, 성인들은 세상에서의 굴욕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높임받는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성 바실리오는 “모욕은 겸손의 훈련”이라고 가르쳤고, 성 베르나르도는 “겸손의 길 없이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도 성인들의 가르침처럼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때때로 찾아오는 가시관을 달게 받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낮출 때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며, 예수님과 함께 받을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희망합시다.
제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

관련성경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요한 19,17) 예수님께서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향해 가신 장면입니다. 도중에 로마 군사들은 시골에서 오던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들어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루카 23,26). 그럼에도 결국 골고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온 힘을 다해 그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셨습니다.
교의적 배경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희생 제물의 행렬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그가 우리의 고통을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고 예언했고(이사 53,4),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타로 나아가심으로써 이를 이루십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두 명의 죄인과 함께 끌려갔다고 전하며(루카 23,32), 이로써 “그분께서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지셨다”는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밝힙니다. 교의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은 구원의 경륜 안에서 새로운 출애굽과 같습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의 어린양과 함께 홍해를 건넜듯이, 이제 인류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메고 가는 십자가를 따라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예수님은 강생을 통하여 모든 인간과 자신을 어느 모로 연결하셨으며, 모든 사람이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길이 곧 우리가 각자 지는 십자가 길과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여러 차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마태 16,24 등) . 교회는 이 가르침을 이어받아, 우리 각자의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교리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구원적 희생에 첫 열매들인 우리를 참여시키길 원하신다”고 하며(CCC 618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음을 명시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단순히 그분 홀로 걸으신 길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앞장서신 구원의 행렬이며, 동시에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는 제자의 도전장입니다. 신앙의 모범으로서 이 길에 가장 충실히 동행한 이는 성모 마리아시며, 전통적으로 교회는 십자가의 길 네 번째 처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눈맞춤을 기억합니다. 마리아는 끝까지 자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을 받았고, 그리하여 수난 신비에 가장 깊이 참여한 분으로 공경받습니다.
깊이 있는 묵상을 위한 안내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실 때마다 크게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묵상합니다. 이미 극심한 채찍질로 기력이 쇠한 상태에서, 크고 거친 나무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일은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세 번 넘어지셨다고 하지요. 그때마다 흙바닥에 쓰러진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에 이마에는 가시관이 박혀 있고 어깨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얹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힘을 내어 그 십자가를 붙잡고 일어서십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큰 사랑으로 십자가를 껴안고 계시는지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 배우십시오.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위해 당신도 십자가를 지고 가십시오” 하고 에스크리바 성인은 권고합니다. 마지못해 질질 끌던 십자가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거룩한 십자가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의 본보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고통의 삶이지만, 동시에 가장 의미 있고 열매 맺는 삶입니다. 우리가 신앙 때문에나 정의와 사랑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어려움들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 영혼을 정화하고 남들에게 은총을 가져오는 도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을 통하여 주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육체의 병고일 수 있고, 마음의 상처일 수 있으며, 돌봐야 할 가족의 어려움이나 해결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신앙을 지키면서 감내해야 하는 불편과 손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들을 외면하거나 내려놓고 싶었던 적이 있다면, 지금 이 묵상 속에서 예수님께 용기를 구해 보십시오. “예수님, 제가 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도록 도와주소서. 주님이 함께 지어 주시면 제 멍에는 편하고 제 짐은 가벼울 것입니다.”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할 때에는 그것이 우리를 짓누르지만, 도리어 끌어안으면 우리를 들어올립니다.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십자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의 십자가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성인의 이 말처럼, 믿음 안에서 자신의 고통을 사랑으로 수용할 때 그 짐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로 오르실 때 성모님께서 그 길을 따라가셨듯,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 여정에서 성모님의 도우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힘들 때에 “고통의 성모님, 저를 위로하소서” 하고 청하면, 성모님께서 우리를 당신 아드님의 발자취로 조용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묵상을 돕는 기도
주님, 십자가를 지고 저 앞서 가셨기에 저희도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길을 얻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크고 작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믿음과 용기를 주소서. 제 십자가가 버거워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주님과 성모님께서 함께 그 무게를 나누어지셔서 끝까지 완주할 힘을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워 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제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소서. 주님, 언제나 제 앞에 서서 이 길을 이끌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신과 함께 제 영혼의 구원과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이 길을 걷겠나이다. 아멘.
성인의 말씀 및 신앙의 모범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곧, 사랑으로써 고통을 통하여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는 새로운 차원입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담화] 제18차 세계 병자의 날 교황 담화문 > 공지 | 천주교 전주교구). 이는 우리가 지는 십자가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결합될 때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인은 또한 “고통을 통한 세상 구원의 최고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된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수가 솟는 샘에 비유했습니다 ([담화] 제18차 세계 병자의 날 교황 담화문 > 공지 | 천주교 전주교구). 이처럼 우리의 고통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합쳐질 때 생명의 샘이 될 수 있습니다. 성녀 로사 리마는 “십자가를 떠나서는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 다른 사다리가 없습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 Catholic Culture). 누구도 피하고 싶지 않은 고난의 사다리를 통하여 오히려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성 시몬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잠시 지는 영광을 얻었고(루카 23,26), 그로 인해 그의 아들들까지 신앙인이 되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마르 15,21 참조). 이처럼 우리가 기꺼이 짊어지는 대속적 고통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은총의 씨앗을 심습니다. 성 바오로는 “나는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고 고백하며(콜로 1,24), 고통의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희생과도 주님은 당신의 보속에 포함시켜 주시고, 영혼 구원의 몫을 나누어 주십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에게 필요한 덕목은 인내와 희망”이라 하였고, 성 알폰소는 “십자가는 성인의 왕관”이라 불렀습니다. 이처럼 모든 성인이 걸어간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도록, 그들의 전구를 청해 봅시다.
제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

관련성경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두 강도도 예수님 좌우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요한 19,18.30) .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지상 삶과 사명이 모두 완수된 순간이었습니다.
교의적 배경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의 완성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우리 죄를 대신한 유일하고 완전한 희생 제사”라고 가르칩니다. 구약 시대에 거듭 바쳐졌던 동물 제사들은 모두 이 십자가의 대속 제사를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이시자 동시에 희생양이 되셔서, 자신을 아버지께 온전히 봉헌하심으로써 인간의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다”(필리 2,8 참조)고 선언합니다. 또한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임을 거듭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복음 보도는(마태 27,51) 이제 더 이상 짐승의 피로 드리던 옛 제사가 필요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로 열린 새롭고 영원한 속죄의 길이 마련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공의회 문헌들은 예수님의 이 희생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깨어진 우정이 회복되었다”고 가르치며(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9항 등 참조), 예수님의 죽음이 곧 인류를 위한 생명의 원천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직후, 군사의 창에 찔려 흘러나온 물과 피는 성사(聖事)들의 원천으로 이해됩니다(요한 19,34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죽어 잠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의 탄생을 보았다”고 말하며,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새 하와인 교회가 태동했다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교회의 탄생이며, 성사와 성령을 통한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또한 교회는 이 신비 안에서 성모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났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십자가 아래에 선 마리아에게 제자 요한을 맡기시며 “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하셨고(요한 19,26-27), 이로써 마리아는 모든 믿는 이들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교리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바친 희생에 특별히 깊이 협력하신 분이 바로 성모 마리아”임을 가르치며, 우리 구원의 여정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순간 마리아의 일곱 칼이 가슴을 꿰뚫는 고통을 겪으셨지만(루카 2,35 참조), 그 고통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낳는 산고(産苦)였던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는 구원의 역사와 약속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구약의 예언, 특히 “그는 자기 생명을 속죄 제물로 내놓음으로써 자손을 보고 오래 살며,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던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현실이 된 것입니다(이사 53,10 참조).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간과 하느님의 사이에 가로놓인 죄의 장벽은 허물어졌고, 화해와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깊이 있는 묵상을 위한 안내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운 정오 무렵,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채 십자가 위에서 서서히 숨을 거두십니다. 그 세 시간 동안 하늘과 땅이 뒤흔들렸고,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도 요동쳤을 것입니다. 조롱하던 이들도 예수님의 태도를 보며 차츰 침묵에 잠겼을지 모릅니다. 임종 직전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곧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처절한 외마디를 남기셨습니다(마태 27,46).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 성부와 영원히 하나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자리에서 버림받은 처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절망이 아니라 완전한 신뢰와 봉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봉헌하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는, 구원 계획의 성취에 대한 안도와 함께 아버지께 드리는 순명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 밑에 선 마리아와 요한, 그리고 몇몇 여인들은 처절한 슬픔에 잠겼지만 동시에 신비로운 평화도 맛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비로소 우리의 속량(贖良)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 금요일을 “거룩한 금요일”이라 부르는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깊은 감사와 경배입니다. 지금 눈을 감고 마음 속으로 갈바리아 언덕을 향해 걸어가 봅시다. 그리고 십자가 곁에 서서 우리를 위해 숨을 거두시는 주님을 우러러보십시오.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셔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려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입술로는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저를 구원해 주셨나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다짐해 봅시다. “주님께서 이토록 값비싼 대가로 사신 내 영혼을, 하찮은 죄의 종살이로 다시 넘기지 않겠습니다.” 십자가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신비의 제목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실제 우리 신앙은 부활의 희망으로 나아감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요한 12,24).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부활의 풍성한 열매를 위한 씨앗이었습니다. 지금은 슬픔의 씨를 뿌리는 때이지만 머지않아 기쁨의 수확을 거두리라는 확신을 갖고,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킵시다. 십자가 아래 함께 있었던 마리아와 요한처럼 신실한 제자로 머무릅시다. 우리의 묵상도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곧 다가올 영광의 신비 안에서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묵상을 돕는 기도
주님, 십자가 위에서 제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것을 완성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를 살리시어 이제 제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씻은 이 영혼을 지키도록 도와주시고,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삶을 살 힘을 주소서. 주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저를 깊이 결합시키시어, 제 오래된 자아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롭게 주님과 함께 살아나게 하소서. 저도 매일 제 자신을 죽여 주님께 봉헌하오니, 부디 제 작은 희생을 받아들이시어 세상을 위한 사랑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영광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십자가의 공로로 이뤄진 구원이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아멘.
성인의 말씀 및 신앙의 모범
성 프란치스코는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저희는 주님의 모든 성당과 온 세상에 모셔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며 찬미하나이다. 주님께서 성세계에 걸쳐 계신 모든 성당에서, 바로 이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셨기 때문이옵나이다.” 이 기도는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잘 보여 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죽음까지 받아들이셨다. 이는 죽음으로 죽음을 쳐부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부활의 생명을 길을 여셨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우리는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양 옆에 서 있어야 한다. 마리아처럼, 요한처럼.”이라고 권고합니다. 십자가 곁에 끝까지 머문 이들은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반면 도망쳤던 제자들은 부활의 기쁨을 늦게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삶의 시련과 어둠 앞에서 십자가를 등지지 말고 직시하도록 합시다. 십자가를 직시하는 것이 때때로 우리의 죄와 한계를 마주하는 괴로움일지라도, 그 자리에 머물 때 주님께서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십자가 나무에서 열린 낙원의 문을 목도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활짝 열린 천국 문을 바라보며, 그 앞에 엎드려 감사와 흠숭을 드립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보여주신 사랑의 새 계명을 가슴에 새겨,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맺음말: 묵상을 생활로 – 실천 가이드와 신앙의 성장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는 여정은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묵상을 일상에서 지속하고 실천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정리합니다.
- 말씀과 함께하는 묵상: 각 신비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예를 들어 1단을 묵상하기 전에는 루카 22장 39~46절의 겟세마니 장면을 천천히 읽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당시의 정황과 예수님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며 묵상이 한층 깊어집니다. 묵상 중간중간 마음에 와 닿는 성경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리거나 암송해 보십시오.
- 상상 기도(관상기도)의 활용: 성 Ignatius의 권고처럼, 복음 장면 안으로 상상의 눈을 통해 들어가 보십시오. 예수님 곁에 있는 한 사람이 되어 주변을 살펴보고, 소리와 냄새, 분위기를 느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채찍 당하실 때 군중 속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고, 예수님 눈빛이 나와 마주치는 체험을 해봅니다. 이러한 관상적인 묵상은 지적인 이해를 넘어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도록 도와줍니다.
- 십자가의 길 등 전통 기도 활용: ‘십자가의 길’, ‘성토요일 7언 처칠 묵상’, ‘고통의 성모 7고통 묵주기도’ 등 전통 기도를 활용해 보세요. 개인 묵주기도 중간에 포함하거나 금요일 공동체 기도 때 함께 바쳐도 좋습니다.
- 개인기도와 침묵: 각 신비를 마친 후 짧게라도 침묵 시간을 가져보세요. 눈을 감고 말씀과 감정을 가슴에 새기며, 예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 해보십시오. 성당이나 집에서 십자가 성상 앞에 5분간 앉아 있거나, 매주 금요일 오후 3시(예수님 운명 시각)에 잠깐 묵상하기 등을 실천해 보십시오.
- 공동체와 나누기: 신뢰할 수 있는 영적 동반자나 소공동체와 묵상을 나누고, 함께 짧은 묵상글로 기도를 시작해 보세요. 가족과 함께 자녀들에게 수난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질문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 삶으로 실천하기: 각 신비에서 받은 감동을 작은 행동으로 옮겨 보세요.
- 1단 (순명): 당일 내 뜻을 내려놓고 남을 배려하기
- 2단 (회개): 가까운 시일 내 고해성사 보기
- 3단 (겸손): 대화할 때 경청하고 교만한 태도를 삼가기
- 4단 (희생): 불편한 일 자원하기(남 부탁 들어주기 등)
- 5단 (감사와 사랑): 주변에 희생적 사랑 실천하기(용서, 어려운 이 돕기 등)
신앙적 성장의 방향
고통의 신비를 꾸준히 묵상하며 실천할 때, 우리의 신앙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성장합니다. 첫째, 겸손과 순종의 덕. 둘째, 희생과 사랑의 정신. 셋째, 회개와 성결의 민감성. 넷째, 위로와 희망의 근원. 다섯째, 그리스도와의 친밀감.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예수님의 내면으로 초대해, 묵상할수록 주님과 친구처럼 가까워지게 합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학교’라고 불릴 만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신비 하나하나를 함께 묵상해 주시며,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십니다. 묵상 중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성모 마리아님, 저와 함께 해주세요”라고 청해 보십시오.
이 묵상이 독자 여러분을 주님 수난의 크신 사랑 안으로 깊이 이끌고, 그 사랑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