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

성 베드로 샤넬 신부가 푸투나 섬의 아이들 곁에 서 있는 모습. 순백의 제의를 입고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으며, 배경에는 작은 성당과 야자수가 어우러진 해변이 펼쳐져 있다.

1. 생애 개요

성 베드로 샤넬(1803~1841) 사제 순교자의 조각상.
손에 들고 있는 종려나무 잎은 순교의 상징입니다.

성 베드로 샤넬(Peter Louis Marie Chanel)은 1803년 7월 12일, 프랑스 동부 앵(Ain) 지역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에는 양치기 일을 도우며 가족을 도왔고, 당시 그의 신앙과 총명함을 눈여겨본 본당 신부의 권유로 학교 교육을 받게 되면서 신학의 소명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신학교와 신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였고, 마침내 1827년 7월 15일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서품 이후에는 교구 부본당 신부로 사목하면서, 신자들이 떠난 낙후된 본당을 성실히 돌보고 병자들을 정성껏 간호해 신자들의 깊은 신뢰를 얻게 됩니다.

이 시기, 그는 해외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들을 접하며 큰 감명을 받았고, 자신의 삶을 복음 선포를 위해 외국 선교에 바치고자 하는 열망을 점점 키워가게 됩니다.

1831년, 그는 마리아회(마리스트회) 수도자로 입회하여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당시 프랑스 리옹을 중심으로 새로운 선교 수도회가 형성되던 시기로, 샤넬 신부는 창설자인 콜랭(Jean-Claude Colin) 신부와 함께 교황청 인가를 요청하는 등 수도회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남태평양 오세아니아 지역에 복음을 전할 선교사를 요청하게 되었고, 1836년 마리아회 소속 선교단이 조직되자, 샤넬 신부도 그 일원으로 선발됩니다.

평소부터 해외 선교를 간절히 염원하던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여 긴 항해를 떠날 준비를 마칩니다.

2. 선교 활동 (오세아니아)

1836년 크리스마스 이브, 성 베드로 샤넬 신부는 프랑스를 떠나 오세아니아 선교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배를 타고 대서양과 남아메리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무려 10개월 이상에 걸친 항해 끝에, 1837년 11월 8일, 그는 마침내 폴리네시아의 푸투나(Futuna)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푸투나 섬은 이전까지 기독교 선교사가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외딴 섬이었습니다.
부족 간의 전쟁과 식인 풍습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 있었고,사람들은 악령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기반한 종교 문화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샤넬 신부는 이처럼 낯설고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 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한결같이 인내하며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현지 언어를 배우며 주민들과 마음을 나누었고, 병자들을 돌보고 임종자에게 세례를 베풀며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태도에 감동한 주민들은 그를 ‘마음씨 고운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의 온유하고 친절한 성품은 이 별명 하나로 잘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회심하는 이가 거의 없었지만, 그는 주일 미사와 교리 교육을 성실히 이어갔고, 점차 몇몇 이들이 그의 가르침에 관심을 보이며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1839년 2월, 강력한 사이클론이 섬을 강타하여 집들과 농경지가 크게 파괴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샤넬 신부는 낙담하지 않고 주민들과 함께 피해 복구에 힘썼습니다.

이처럼 그는 외롭고 척박한 선교지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섬 주민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며 복음의 씨앗을 정성껏 뿌렸습니다.

그의 열정과 성실함은 결국 결실을 맺기 시작했고, 섬의 지도층 일부도 가톨릭 교리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3. 순교 사건

푸투나 섬의 통치자 니우리키(Niuliki)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추장이자, 토착 신앙의 제사장 역할도 함께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샤넬 신부를 외지인으로서 환대하며 호의적으로 맞이했지만, 점차 그의 복음 선포가 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특히 니우리키 추장의 아들과 딸마저도 가톨릭 교리에 관심을 보이고 세례를 청하자, 그는 자신의 권위와 전통 신앙 체계가 무너질까 두려워하며 깊은 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1841년 4월 28일, 니우리키는 사위인 전사 무수무수(Musumusu)에게 명령을 내려 샤넬 신부를 공격하게 합니다.
무수무수와 그의 부하들은 이른 새벽,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있던 샤넬 신부의 집을 기습했고, 그를 잔혹하게 구타한 뒤 도끼로 내리쳐 살해하였습니다.

그 충격적인 순간에도, 샤넬 신부는 어떤 저항이나 원망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며, “말리에 후아이(괜찮습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서른일곱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죽음은 푸투나 섬에 깊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남은 교우들과 섬 주민들은 샤넬 신부의 순교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에 대한 존경과 회개의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순교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푸투나 섬 주민 전체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그 땅에서 신앙의 꽃이 활짝 피어난 것입니다.

심지어 샤넬 신부를 살해한 무수무수 또한 훗날 깊은 회개 끝에 개종하였고, 죽기 전 남긴 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무덤을 성당 입구에 두어라.
사람들이 샤넬 신부님을 공경하러 올 때,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게 하여달라.”

이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순교자에게 용서를 청하는 고백이자, 샤넬 신부의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의 생전 사명은 순교로 끝났지만, 그 피는 복음화의 씨앗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성 베드로 샤넬은 오세아니아 지역의 첫 번째 순교자이자,그 지역 복음화의 빛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4. 시성 과정

성 베드로 샤넬 신부의 순교 소식은 곧 유럽 전역의 가톨릭 교회에 전해졌고, 그의 거룩한 삶과 죽음에 감동한 많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공경을 시작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9세는 1857년, 그를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며 공식적인 시복 절차를 개시하였고, 그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인정을 바탕으로 1889년 11월 17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시복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은 그를 “오세아니아의 첫 순교자(Oceanicæ protomartyr)”라고 부르며, 그가 머나먼 섬에서 흘린 피가 복음의 씨앗이 되었음을 교회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 6월 1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 베드로 샤넬은 정식으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그와 함께 오세아니아 전 지역은 복음을 위한 순교자의 전구를 지닌 특별한 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시성과 함께, 교황청은 그를 오세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선언은 그가 단지 푸투나 섬만이 아니라 오세아니아 전체, 태평양 도서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중재하는 보편 교회의 전구자임을 뜻합니다.

그의 시성은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이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얼마나 위대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5. 교회에서의 기념

가톨릭 교회는 매년 4월 28일을 성 베드로 샤넬 축일로 지내며, 그의 순교와 복음 선포의 삶을 기억하고 기립니다.

이날은 전례력 안에서 순교자 기념일로 지정되어,미사와 성무일도에서 성인의 이름이 언급되며
신자들은 그를 통해 하느님께 전구를 청하게 됩니다.

특히 그가 순교한 푸투나 섬을 포함한 오세아니아 지역에서는 이 축일이 매우 특별하게 기념됩니다.
푸투나에서는 성인의 순교일인 4월 28일이 공식 공휴일로 지정되어, 섬 전체가 성인의 희생을 기리고 감사하는 행사를 엽니다.

또한 오세아니아의 여러 나라 성당과 본당에서도 해마다 이날을 기념하는 성월례 미사, 성인의 삶과 영성을 다루는 강론,그리고 순교지 순례 등 다양한 신심 행사가 거행됩니다.

성 베드로 샤넬은 현재 오세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태평양 섬 지역의 많은 신자들은 그를 자신들의 신앙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유해는 한때 프랑스로 이송되었다가, 1977년 다시 푸투나 섬으로 반환되어 현재 그곳의 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 성지를 찾아 기도하며, 그의 신앙과 삶을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성당과 학교, 가톨릭 기관들이 성 베드로 샤넬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으며,
아일랜드 더블린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 ‘샤넬’의 이름을 딴 본당과 학교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렇듯 성 베드로 샤넬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전 세계 교회 안에서 기억되고 기념되며 그의 영성과 선교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6. 현대적 의미

성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의 삶과 죽음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깊은 울림과 도전을 줍니다.

▸ 선교 열정의 본보기

샤넬 신부의 삶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선교하는 공동체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가장 멀고 낯선 땅까지 기꺼이 떠났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 사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마태 28,19-20) 하신 말씀처럼,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선교사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함을 성인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 신앙 증거(순교)의 힘

샤넬 신부는 죽기까지 복음을 증언한 참된 순교자였습니다.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고, 그가 흘린 피 위에 온 섬이 회개하여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복음화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이는 한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큰 영적 결실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세속화와 무관심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증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샤넬 신부의 모범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 사랑과 온유의 선교

샤넬 신부는 무력이나 강요가 아닌, 사랑과 봉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주민들을 돌보며 병자를 간호하고, 언어를 배우며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의 별명인 ‘마음씨 고운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곧 복음 그 자체였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선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존중, 섬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 진정한 복음 전파의 길임을, 성인은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 보편 교회의 연대와 희망

샤넬 신부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태평양 섬의 백성들이 그의 전구를 믿고 의지하는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덕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피어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언어와 문화를 초월해 연결되어 있다는 보편성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오세아니아의 순교 성인들을 일컬어 “그 지역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이자 미래의 희망”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피 흘린 백성들을 위해 하늘에서 계속 기도하고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성 베드로 샤넬은 지금도 하늘에서 교회를 위해, 특히 오세아니아 교회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는 살아 있는 전구자입니다.


결론적으로, 성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는 선교와 증거, 사랑과 화해의 살아 있는 본보기입니다.
그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믿음을 증거하려는 용기,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결심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의 순교를 기억하며 그를 모든 민족들의 회개와 복음화를 위한 수호자로 공경하고 있고, 우리 신자들 역시 그 모범을 따라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의 축일에 바치는 교회의 기도처럼 우리는 다짐합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교회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베드로 샤넬을 순교의 영광으로 이끄셨으니,
우리도 그처럼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 참고 자료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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