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출판사를 대신한 한국어판 주):
본 문서는 고(故) 성(聖) 로사(Rose) 데 리마의 생애를 다룬 17세기경의 영어 저작을 번역한 것으로, 원문은 미국판 퍼블릭 도메인 자료입니다. 번역자는 당대 문체와 내용을 충실히 살리되 현대 한국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단 구성을 다소 조정하고 표현을 다듬었습니다. 17세기 페루 리마의 지명, 종교적 풍습, 인물명 등은 가능한 한 원음에 가깝게 옮겼음을 밝힙니다.


성 로사 데 리마의 생애

복된 로사(Rose)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비옥한 부분에 심고 가꾼 첫 영적 꽃이었다. 1586년 4월 20일, 남아메리카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가스파르 플로레스(Gasper Florez), 어머니는 마리아 올리바(Mary Oliva)로, 두 분 모두 혈통은 좋았으나 재산은 넉넉지 않았다. 경건한 어머니는 이전 출산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로사를 낳을 때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날 때 이중 막으로 싸여 있었는데, 이는 장미 봉오리가 막 피어나는 순간 꽃잎으로 감싸인 모습과 같았다.

아기의 대모(代母)는 이사벨 데 에레라(Isabel of Herrera) 부인이었고, 세례명으로 ‘이사벨’을 주었다. 그러나 세례 후 석 달이 지났을 때, 아기가 요람에서 잠든 사이 얼굴 위에 맑고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나는 듯한 기적이 일어났다. 이를 본 가족과 친지들은 모두 그녀를 ‘로사(장미)’라고 부르게 되었고, 대모는 세례명을 무시했다며 불쾌해했지만, 리마 대주교가 견진성사를 집전할 때 ‘로사’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부여하면서 논란은 종결되었다.

훗날 로사는 이 이름이 자신의 외모를 칭송하려는 세속적 의도로 붙은 것이 아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성모 마리아께서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 아들 예수께서 네 이름을 기뻐하시니, 내가 너를 ‘로사 데 산타 마리아(Rose of S. Mary)’라 부를 것이다.”라는 위로를 전하시자, 그녀는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유아기부터 로사는 한 번도 심하게 우는 법이 없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유일하게 울음을 터뜨린 것은 유모가 낯선 집에 데려갔을 때였는데, 마치 세상과 분리된 고요한 집 안을 더 좋아하는 듯 보였다. 세 살 무렵, 가슴을 상자 뚜껑에 찧어 엄지손톱이 뜯겨나가는 고통에도 울지 않았고, 의사가 손톱을 뿌리째 뽑을 때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귀를 치료하는 고통스러운 수술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드러난 놀라운 인내는 훗날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아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 영혼에 역사하시면 그 영혼은 초자연적 은혜에 순응하게 마련이다. 어린 로사는 고통과 희생을 즐기며 자라났다. 세 살 무렵, 동생이 실수로 진흙을 머리에 쏟아 그녀가 약간 언짢아 하자 동생은 뜻밖에도 “누나, 세속의 치장은 지옥 불에 들어갈 밧줄과 같아!”라고 말했다. 이는 로사에게 하늘의 목소리처럼 들렸고, 그때부터 세속적 즐거움을 경멸하고 내면의 순수함을 지키는 데 전념했다.

다섯 살이 되자 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 동정을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신랑을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배우자삼겠다.”는 서약은 이후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성장하며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외적 아름다움을 흐리고, 세속 남성에게서 자신을 멀리했다.

어린 시절의 순종심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로사는 부모의 말이라면 불합리해 보여도 기꺼이 따랐다. 어머니가 딸의 미모를 강조하려 화장수를 바르라고 명령했을 때, 로사는 정중히 거절했지만 끝내 명령에 따랐다. 마음속으로는 가시관을 쓰듯 고통을 떠안았고, 이를 알게 된 어머니가 이후로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잘못된 바느질 방법을 일부러 지시하여 그녀를 시험했을 때도 로사는 묵묵히 따랐을 뿐만 아니라 꾸중을 달게 받았다. 그녀의 순종은 하녀들에게까지 미쳤다. 하녀가 무엇을 시켜도 기쁘게 수행했고 불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물 마시는 것까지 여섯 날이나 제한했을 때도 묵묵히 견뎠으며, 손·발에 염증이 생겨도 거친 보온용품을 벗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에 로사는 바느질과 정원 가꾸기로 생계를 도왔다. 열두 시간 기도 후 자정이 넘어서도 수예품을 만들어 팔아 가계를 보탰고, 꽃을 따 팔아 모은 돈으로 부모를 봉양했다. 부모가 병들었을 때는 밤낮 없이 간호하며 사랑과 효성으로 가족을 감동시켰다.

다섯 살에 세운 동정 서약은 청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 카타리나 드 시에나(Saint Catherine of Siena)를 본보기로 삼아 도미니코회 제3회원이 되기를 결심했다. 많은 이들이 혼인을 제안했지만 로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1606년 8월 10일, 스무 살이던 그녀는 마침내 도미니코회 제3회원이 되었고, 그 후로는 봉헌 생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

로사는 자신이 소속된 회를 바꾸라는 권유를 여러 번 받았다. 카르멜 수도회나 클라라 수도원이 제안되었지만, 하느님은 여러 표징으로 그녀를 도미니코회에 남게 하셨다. 가령 흑백 나비가 나타나 도미니코회의 상징을 보여 준 일이나, 성모님 현현을 통해 변화를 만류하신 사건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성 카타리나와 같은 길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겸손은 로사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덕행이었다. 그녀는 가장 천하고 하찮은 일을 맡아 기쁨으로 수행했고, 사람들의 칭찬은 괴로움으로 여겨 숨거나 더 큰 보속을 찾아 자신을 낮추었다. 때로는 이유 없이 어머니나 고용인에게 꾸중을 들을 때조차, “내가 죄인이라 마땅히 받을 벌을 받는다.”며 기뻐했다. 그녀의 순결은 완벽에 가까웠고, 서른한 살의 생애 동안 세속적 유혹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열한 명의 성직자가 맹세했다.

육신을 제어하기 위한 단식과 고행도 혹독했다. 다섯 살부터 일주일에 세 번 빵과 물로만 지냈고, 대사순 시기에는 오렌지 씨앗 몇 알로 하루를 견디곤 했다. 여덟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성체성사만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 철사로 만든 채찍으로 자신을 매질하고, 사슬이 살에 파고드는 통증을 묵묵히 감내하며, 돌과 깨진 기와 파편을 깐 침상에서 잠을 청했다. 머리에는 은판과 철침 99개로 만든 관을 써서 예수의 가시관을 묵상했고, 관의 위치를 매일 조금씩 바꾸어 새 상처를 내곤 했다.

평안을 찾을 장소로는 정원 구석에 손바닥만 한 암자를 지었다. 그곳에서 로사는 세속의 관심을 피하고 기도에 몰두했다. 모기가 들끓어도 기이하게도 그녀를 물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숨겨진 백합’이라 불렀다. 그 암자에서 예수님과의 신비적 혼인 체험도 이루어졌다. 성모님이 미소 지으며 그녀를 예수께 이끌었고, 예수님은 “내 마음의 장미여, 내가 너를 신부로 맞이한다.”고 선언하셨다. 로사는 금세공인에게 반지를 주문해 “내 마음의 장미, 내가 너를 신부로 택하노라.”는 문구를 새기고 성체 앞에 바침으로써 매일 이 은총을 상기했다.

로사의 하루는 열두 시간의 묵상기도로 채워졌다. 번잡한 교회 안에서도 성체 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깊은 관상에 들었고, 잠들 때조차 하느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하느님의 전능, 자비, 거룩, 지혜를 차례로 묵상하며 영혼을 불태웠고, 관상의 열매는 사랑과 극기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하느님과 가까운 영혼에게 허락되는 정화의 시련도 있었다. 로사는 15년 동안 매일 한두 시간씩,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듯한 극심한 낙담에 빠졌다. 신학자들은 이것이 자연적 병이 아니라 영적 정화라고 판단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이나 성모님, 혹은 수호천사가 나타나 위로했고, 그녀는 더욱 강해졌다.

예수님과 성모님, 성 카타리나, 수호천사와의 친밀한 대화가 잦았지만 사탄의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마귀가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나 위협해도 로사는 평온히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이기곤 했다. 그녀는 사탄을 두려워하기보다 불쌍히 여기는 듯 담대하게 맞섰고, 기도와 희생으로 승리했다.

삶 전체가 십자가의 길이었던 그녀는 빈곤과 질병, 부모의 오해 속에서도 인내심을 잃지 않았다. 손톱이 뽑히고 귀를 수술받을 때처럼, 후두염·늑막염·심장 통증·류머티즘 등 수많은 병고에도 “주님, 제 고통을 더하셔도 좋으니 당신 사랑만 더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녀에게 침상은 하느님께 가는 사다리였고, 죽음 직전까지도 부드러운 베개를 거부하며 나무막대기로 엇갈린 십자가 형태의 베개 위에 머리를 두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얼굴을 밝히는 불꽃과 같았다. 성체공경은 삶의 정점이었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얼굴에 환한 빛이 번졌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성체성사 후 힘을 얻는 일이 잦았으며, 성체를 모독하려는 이단이 나타나면 목숨을 걸고 성사를 지키려 했다. 네덜란드 함대가 리마를 공격할 때 성체를 보호하기로 결심했으나, 적은 도시를 떠났고 로사는 더욱 깊은 감사로 충만해졌다.

성모 마리아와 성모자 상에 대한 공경도 각별했다. 도미니코 성당의 묵주기도 성모상 앞에서 기도할 때면 성모상과 아기 예수가 미소 짓거나 손짓하는 듯한 체험을 했고, 십자가를 볼 때마다 경외심으로 무릎 꿇었다. 성녀 카타리나 드 시에나의 축일마다 그녀의 형상을 꽃으로 장식해 메고 행진하며 모범을 되새겼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졌다. 로사는 죄인들의 회개와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직접 수익을 나누었고, 중병 환자를 돌보며, 혐오스러운 병을 앓는 이들도 기꺼이 간호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빈자들의 어머니’라 불렀다.

하느님 섭리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여러 기적처럼 보이는 사건으로 확인되었다. 양식이 떨어지면 기도 후 누군가가 빵을 가져다주었고, 빈 항아리에 다시 꿀이 차오르거나 뜻밖의 돈이 도착했다. 이 체험은 가족과 이웃에게 신앙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느님은 로사에게 수도원 건립과 미래 사건에 대한 계시도 주셨다. 리마에 세워질 도미니코 수녀원의 이름과 위치를 예언했고, 이는 훗날 정확히 이루어졌다. 여러 사람의 장래를 이야기해 준 예언도 잇달아 성취되었다. 신학자들은 그녀의 능력이 성령의 선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삶의 끝날이 다가오자 로사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8월 24일)에 천국의 신랑과 영원히 연합할 것임을 알고 특별히 그 날을 공경했다. 서른한 살이 될 즈음, 이전보다 극심한 질병이 몰려와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주님, 더 큰 고통을 주셔도 됩니다. 당신의 사랑만 더해 주세요.”라고 반복했다. 8월 24일, 그녀는 나무를 엇갈린 십자가 형태의 베개 위에서 “예수님, 제게 오소서!”라고 두 번 부른 뒤 눈을 감았다. 그녀가 숨을 거둔 후에도 얼굴은 장밋빛으로 빛났고,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장엄한 축제로 여기며 경배했다.

로사의 죽음 소식에 리마 전체가 슬픔과 경이로 가득 찼다. 이튿날 수많은 인파가 시신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장례 행렬은 도로를 막을 정도로 컸다. 모두가 그녀를 ‘성녀’라 불렀으며, 무덤은 곧 기적의 본거지가 되었다. 1년 뒤 무덤을 개봉했을 때 시신은 썩지 않고 향기가 풍겼으며, 이 경이로운 표징은 그녀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는 확신을 더했다.

하느님은 선택된 이들에게 로사의 천상 영광을 드러내 보이셨다. 어떤 거룩한 이들은 환시에서 성모 마리아가 장미꽃처럼 빛나는 로사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광경을 보았으며,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그녀를 중개자로 삼아 기도했다. 원수들이 화해하고 냉담한 신자들이 신앙으로 돌아오는 열매가 이어졌다.

로사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무덤의 흙이 병을 치유하고, 두 명의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으며, 치명적 질병이 낫는 은혜가 이어졌다. 리마와 남미 전역에서 그녀를 ‘남미의 장미꽃’이라 부르며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했다.

로사의 덕행과 기적이 널리 알려지자 페루 교회와 수도회는 교황청에 시성을 청원했다. 수십 년간의 조사를 거쳐 교황 클레멘스 9세는 1668년 그녀를 ‘복자’로 선포했고, 1671년 클레멘스 10세 교황이 정식 시성했다. 이는 남미 출신 최초의 성인 선언으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큰 기쁨을 안겼으며, 그녀의 축일은 8월 30일로 정해졌다. 사람들은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하며 로사의 모범을 따라 사랑과 겸손, 극기와 신앙 안에서 살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