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설명

성 요사팟 (본명: 이반 쿤체비치)은 1580년경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했던 볼히니아의 블라디미르에서 정교회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빌뉴스에서 상인으로 일하며 생활했지만, 깊은 신앙심과 기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수도 생활을 결심하게 됩니다. 1604년, 그는 빌뉴스에 있는 성삼위일체 수도원에 입회하여 요사팟이라는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이 수도원은 1596년 ‘브레스트 교회 연합’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일치한 동방 가톨릭 교회 소속이었습니다.

요사팟은 기도와 엄격한 고행 생활에 정진했으며, 요셉 벨랴민 루츠키와 함께 성 바실리오 수도회의 개혁과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성덕과 학문은 널리 알려졌고, 1618년에는 폴로츠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대주교가 된 그는 자신의 교구에 브레스트 연합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성직자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교구 시노드를 개최했으며, 황폐해진 성당들을 보수하는 등 교구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나, 로마와의 일치를 ‘배교’로 여겼던 강경파 정교회 신자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반대자들은 그를 ‘영혼을 빼앗는 자’라고 부르며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요사팟은 교회 일치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623년 11월 12일, 그는 사목 방문 중이던 비텝스크(현 벨라루스)에서 반대자들이 사주한 성난 군중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군중은 그의 관저를 습격했고, 요사팟은 자신의 사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주님, 이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도끼와 총탄에 맞아 순교하였고, 그의 시신은 드비나 강에 던져졌습니다.

그의 순교는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일치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린 ‘일치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643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동방 가톨릭교회 성인으로서는 최초로 공식 시성되었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분열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을 증거합니다.

연대기

  • 1580년경: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블라디미르에서 출생
  • 1604년: 빌뉴스의 성 바실리오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
  • 1609년: 사제로 서품됨
  • 1617년: 폴로츠크의 부교구장 대주교로 서품됨
  • 1618년: 폴로츠크 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직을 계승
  • 1623년 11월 12일: 비텝스크에서 교회 일치를 반대하는 군중에게 순교
  • 1643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됨
  •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