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도덕적 계명으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신앙과 도덕의 기초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단순한 법적 조항이 아닌, 하느님과의 계약 안에서 도덕적 삶으로 초대하는 계시로 이해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는 십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에 필수적이며, 도덕 생활의 기본 틀이자 교리 교육의 핵심 요소라고 가르칩니다.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와 함께 십계명은 교회의 교리교육에서 핵심을 이루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적 지도로 제시됩니다. (cf. CCC 2064–2068)

  십계명은 겉으로 보기에 “~하지 말라”는 금지 조항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계명의 핵심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달려 있다.”
(마태오 22,37–40)

  교회는 이 말씀을 바탕으로 십계명이 단순한 외적 규칙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기준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소극적 금지가 아닌 적극적 선의 실천을 요청하는 것으로, 각 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구체화한 도덕적 요청으로 이해됩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라,“타인의 재산을 존중하고, 정의와 사랑에 입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을 동반합니다.(cf. CCC 2401–2402)

  성 바오로 사도 역시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3,10)

  따라서 십계명을 지키는 삶은 곧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삶이며, 이를 어기는 것은 사랑의 결핍을 드러내는 행위로 여겨집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덕적 자유와 참된 인간다움을 위한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탈출기와 신명기에 나타난 십계명 – 본문 비교와 신학적 함의

  십계명은 구약 성경의 두 곳에 명시되어 있다. 탈출기 20장 2–17절신명기 5장 6–21절이 그것으로, 두 본문 모두 십계명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기본적인 계명 조항들은 동일하지만, 특히 안식일 준수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신학적 강조점을 보여준다.

  탈출기에서는 하느님의 창조 사역을 근거로 안식일 준수를 명령한다.

“주님께서는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탈출기 20,11)

  이 본문은 안식일이 창조 질서의 일부이며,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신앙 행위임을 보여준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노동 후 쉼을 통해 거룩한 삶의 리듬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면,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곧 구원 사건을 상기시키며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한다.

“너희는 이집트 땅에서 종이었던 사실을 기억하여라.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희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이다.”
(신명기 5,15)

  여기서는 해방된 백성으로서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날로서의 안식일이 강조된다. 이처럼 안식일 계명의 근거가 창조와 구원이라는 두 신학적 차원에서 해석되면서, 십계명은 단순한 도덕 법규의 모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covenant)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실제로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은총과 구원 행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계율이다. 하느님은 먼저 일방적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탈출기 20,2 / 신명기 5,6)

  이 서두는 십계명이 은총에 기초한 계약 윤리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율법 준수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신앙적 응답으로 이해된다.(cf. CCC 2060–2063)

  또한, 탈출기 31장 18절신명기 9장 10절에 따르면, 십계명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쓰여졌다.”

  이는 십계명이 단지 인간 사회의 합리적 도덕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계시이자 불변하는 도덕 질서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적 기원은 십계명에 절대적 권위와 보편적 윤리성을 부여하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cf. CCC 2070, 2082)

가톨릭 교회의 십계명 목록과 분류의 특징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분류를 따라 십계명을 가르쳐 왔다.
  이 전통은 유대교나 개신교의 십계명 배열과 몇 가지 차이를 보이며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계명의 통합

  가톨릭은 성경 본문에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으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을 하나의 계명으로 묶는다.
  즉 “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어떤 형상도 만들어 절하지 말라”우상 금지 규정을 하나로 통합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하여라”라는 제1계명으로 가르친다.
  이는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우상 숭배 금지가 본질적으로 같은 계명의 두 측면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곧, 한 분 하느님을 경배하라는 계명 안에 어떠한 형태의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금지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본다.
(cf. 가톨릭 교회 교리서 CCC 2084–2132)

마지막 계명의 분리

 성경에서 한 구절로 제시된 “네 이웃의 아내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내용을, 가톨릭 교회는 아내에 대한 탐욕재물에 대한 탐욕을 별개의 두 계명으로 나눈다.
그리하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를 제9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를 제10계명으로 구분한다.
이는 마음의 정결물욕의 절제라는 두 가지 덕목을 각각 강조하기 위함이다. (cf. CCC 2514–2530)

 이 분류법에 따르면, 가톨릭의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에 관한 첫 세 계명이웃 사랑에 관한 나머지 일곱 계명으로 구성된다.

아래 표는 가톨릭 교회의 공식 십계명 목록(한국어 및 영어), 해당 성경 구절, 그리고 개신교의 십계명과의 배열 차이를 비교한 것이다:

가톨릭 십계명 공식 목록과 개신교 대비

가톨릭 계명 (번호)가톨릭 교리서 공식 문구 (한국어)공식 문구 (영어, CCC)성경 구절 (탈출 20장)성경 구절 (신명 5장)개신교 계명과의 차이
제1계명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I am the Lord your God. You shall not have strange gods before Me.20:2–65:6–10우상 숭배 금지 포함 (개신교는 이 부분을 제1·2계명으로 분리)
제2계명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You shall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in vain.20:75:11동일 (개신교 제3계명)
제3계명주일을 거룩히 지내라.Remember to keep holy the Lord’s Day.20:8–115:12–15안식일 준수 이유 설명의 강조점 차이 (창조† / 구원‡)
제4계명부모에게 효도하여라.Honor your father and mother.20:125:16동일 (개신교 제5계명)
제5계명사람을 죽이지 마라.You shall not kill.20:135:17동일 (개신교 제6계명)
제6계명간음하지 마라.You shall not commit adultery.20:145:18동일 (개신교 제7계명)
제7계명도둑질을 하지 마라.You shall not steal.20:155:19동일 (개신교 제8계명)
제8계명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You shall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your neighbor.20:165:20동일 (개신교 제9계명)
제9계명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wife.20:17†5:21†탐욕 계명 분리 (개신교 제10계명의 전반부)
제10계명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goods.20:17‡5:21‡탐욕 계명 분리 (개신교 제10계명의 후반부)

† 탈출 20:17에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마라…” 부분
‡ 같은 구절에서 “…네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내지 마라” 부분
주: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을 가리킴

교회 전통에서 십계명 이해의 역사적 발전

  초대 교회로부터 교부 시대에 이르기까지, 십계명은 하느님 법의 핵심 요약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1세기 말~2세기 초의 교회 문헌인 「디다케」(Didache) 에도 십계명이 인용되거나 암시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세례 준비 교리와 초기 신앙 교육에 십계명이 실제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cf. Vatican.va, Catechesis on the Commandments, CCC 1962–1964)

  5세기 성 아우구스티노 이후로는 십계명이 예비신자와 신자를 교육하는 교리 교육의 중심 요소로 자리잡았고, 특히 중세에는 교리 문답(catechesis)의 기본 골격으로 십계명이 널리 사용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사도신경, 주님의 기도와 함께 십계명을 신앙 교육의 핵심 교리로 다루었으며, 이는 십계명이 그리스도교 도덕 교리의 중심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일부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교회의 십계명 교육이 미흡하다고 비판하였고, 이러한 도전은 오히려 가톨릭 교회가 십계명 교육을 더욱 체계화하고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트렌트 공의회(1545–1563년)는 십계명이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적 의무이며, 의롭게 된 이라도 평생 십계명을 준수해야 함을 분명히 가르쳤다.  (cf. Council of Trent, Session VI, Chapter 11)

  현대에 이르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또한 이 가르침을 재확인하면서, 십계명이 모든 인간에게 유효하며 구원을 위한 길임을 강조하였다. (cf. Gaudium et Spes §16; CCC 1965–1966)

이처럼 교회 역사 속에서 십계명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도덕 생활의 기본 규범으로 강조되어 왔으며,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부 제2편에는 각 계명별로 신학적 의미와 실천 지침이 상세히 해설되어 있다. (cf. CCC 2052–2557)

  특히 가톨릭 교리는 십계명의 “불변성”과“보편성”을 천명한다. 

  다음과 같은 교리서의 선언은 매우 상징적이다:

“십계명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 누구도 이를 면제시킬 수 없다. 십계명은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새겨 주신 것이다.”
(CCC 2072)

 십계명의 이러한 보편적 구속력은 두 가지 교의적 근거에 뿌리를 둔다.

첫째, 앞서 언급했듯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계시된 도덕법으로서, 그 자체로 절대적인 권위와 영속성을 지닌다.

둘째, 십계명은 자연법(natural law)의 뛰어난 표현으로 이해된다. 자연법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 주신 도덕 원리”이며,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해 선과 악을 식별하도록 이끄는 내적 기준이다. (cf. CCC 1954–1960)

  가톨릭 교회는 모든 인간이 종교나 문화와 무관하게 이 자연법의 빛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십계명은 그중 가장 명확하고 핵심적인 도덕 규범이라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 십계명은 특정 신앙 공동체에만 해당되는 계율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해당하는 윤리적 의무이자 인간 본성에 내재된 항구적인 질서를 반영한다. 그 유효성과 의무성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 영원히 지속된다.  (cf. CCC 2070, 2072)


하느님과의 계약, 그리고 사랑의 계명으로서의 십계명

가톨릭 교리에서 십계명은 단순한 율법 조항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핵심으로 이해된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시나이 산(Sinai)에서 맺으신 계약의 ‘증언판’(증거판)에 직접 새겨진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성립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십계명의 근본 배경은 ‘구원받은 자의 도덕적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탈출기 31,18; 신명기 9,10; CCC 2056, 2060–206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얽매던 모세 율법의 세세한 규정들(유대 전승에서는 613가지 계율로 분류됨)에서는 우리를 해방시키셨지만,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는 결코 해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산상설교를 통해 계명의 참된 뜻을 마음 깊이 새기게 하셨고, 이를 통해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율법의 본질적 계시를 선언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살인, 간음, 맹세 등의 조항을 외적인 행위로만 보지 않으시고, 마음의 의향과 내면의 정결이라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재해석하셨다. 십계명 준수는 곧 행동 이전에 영혼의 상태에 대한 물음이며, 하느님 앞에서의 내적 성실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CCC 1965–1968)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 ―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강조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체를 두 계명으로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 두 계명에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는 말씀(마태 22,37–40)은, 십계명의 모든 조항이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체적 표현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CCC 2055)

  사도 바오로도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하는 계명들과 그 밖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 계명들은 모두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9–10; cf. CCC 2196).

  이처럼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본질이며, 십계명 준수는 곧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가톨릭 교회는 “사랑의 계명은 그 역동성 안에서 상한선은 없지만 하한선은 있다”고 가르친다. 그 하한선이 바로 십계명이 금지하는 바를 지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Veritatis Splendor, 52항)

  아무리 선한 목적이나 의도가 있다고 해도, 살인·간음·도둑질·거짓 증언 등은 근본적으로 사랑에 반하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항상 잘못된 것”(intrinsically evil)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예외를 둘 수 없다. (CCC 1756; Veritatis Splendor 80–82항)

  이 가르침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1993)에서 강력하게 선포되었다. 그는 현대에 일부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 계명을 어겨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도덕적 상대주의로 간주하며, 십계명을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절대적 도덕 규범으로 재확인하였다. (Veritatis Splendor 52–83항)

자연법의 표현으로서의 십계명 – 보편성과 불변성의 근거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하느님의 계시로 주어진 신적 계율로 존중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자연법의 핵심으로 이해한다. 십계명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기본적인 도덕 의무들을 밝혀 주며,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공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 기준을 제시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십계명을 “인간의 참다운 인간성을 가르치는 기본 지침”으로 설명하며, 이 계명들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와 의무가 명확히 드러난다고 가르친다. 아울러 “십계명은 자연법의 특출한 표현을 담고 있다”고 선언하며, 이는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성적 도덕 인식이 서로 일치함을 보여 준다. (cf. CCC 1955–1960, 2070–2072)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 마음 안에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빛을 심어 주셨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죄의 영향으로 흐려졌고, 이에 따라 도덕 진리를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십계명은 바로 이러한 인간을 위해 계시된 법으로서, 본래 인간 안에 존재하는 자연법을 더 명확히 일깨우고 재확인해 준다.

  이로써 십계명은 특정 종교를 넘어 모든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공통된 도덕 원리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살인이나 도둑질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양심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양심의 소리는 자연법의 작용이며, 십계명은 이를 뒷받침하고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이 특정 문화나 종교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에게 유효한 도덕률이라고 가르친다. 교리서는 십계명이 “어느 누구도 폐지하거나 면제할 수 없는, 항상 어디서나 모든 이를 구속하는 의무”라고 분명히 천명하며, 현대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맞서 영원한 도덕 진리의 존재를 선포한다. (cf. CCC 2072)

각 계명의 교리적 해설과 현대적 적용

십계명은 구조상 첫째부터 셋째 계명까지는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넷째부터 열째 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룬다. 가톨릭 교회는 이 계명들이 “그 본래 내용에 있어서 grave obligation (중대한 의무)”임을 가르치며, 신앙인은 이에 대해 심각한 도덕적 책임을 진다고 본다. 이제 각 계명을 순서대로 간략히 풀이하고, 현대 사회에 적용할 몇 가지 사례를 교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 너의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이 계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느님만을 믿고 경배하라는 명령이다. 곧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며, 그에 반하는 모든 형태의 우상 숭배, 미신, 점성술, 마술, 무신론, 불경 등을 단호히 금지한다.
이 계명은 단지 외적 행위를 규제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을 향한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의 실천을 요청한다. 즉, 하느님을 가장 높이 믿고(신덕), 그분께 희망을 두며(망덕),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흠숭(애덕과 흠숭)해야 할 의무를 부과한다. (cf. CCC 2086–2094)

가톨릭 교회는 이 계명이 “그 본래 내용에 있어서 중대한 의무(grave obligation)”에 해당하며, 그 불이행은 중죄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닌, 모든 피조물의 제1의 윤리적 명령으로서의 위상을 의미한다. (cf. CCC 2084)

  현대 사회에서는 물질 만능주의나 성공 지상주의, 자기 우상화 등이 하느님의 자리를 밀어내고 신앙을 약화시키는 가장 흔한 형태의 현대적 우상이다. 예컨대 돈, 권력, 쾌락, 유명인, 취미·오락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면, 이는 사실상 우상 숭배의 실천이 된다. 이 계명은 이러한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을 경계하고, 신앙인이 오직 하느님만을 중심에 두도록 부른다.

  교회는 이러한 의무를 강조하며, 십계명은 사랑의 계명 안에서 그 “하한선(minimum)”을 형성한다고 가르친다. 즉, “하느님 사랑”이라는 이상에는 상한선이 없지만, 하느님 외의 것을 섬기거나 그분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cf. 요한 바오로 2세, 「진리의 광채」 Veritatis Splendor 52항)

  이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중심을 바로 세우게 하며, 하느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인간의 궁극적 목표나 안식이 될 수 없음을 일깨운다. 하느님만이 참된 자유와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고백이 바로 이 계명의 핵심이다.

  이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의 거룩함을 지키라는 명령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in vain)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남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이름을 욕설이나 저주에 사용하는 불경, 거짓 맹세(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거짓을 말함), 성스러운 서약을 어기는 행위, 성당 등 거룩한 곳에서의 부적절한 행동 등을 금한다(탈출기 20,7; 마태 5,33–37; 가톨릭 교회 교리서[이하 CCC] 2142–2167항 참조).

  이 계명은 우리가 말과 행동에서 진실성과 경외심을 지니도록 이끈다. 믿는 이라면 하느님의 이름을 경건히 부르고, 맹세했으면 성실히 이행하며,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로서 정직하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CCC 2154).

  현대 사회에서는 일상 언어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가볍게 남용되거나 인터넷 상에서 조롱의 표현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는데, 신앙인은 이에 주의하여 하느님의 이름을 공경심으로 대해야 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그분의 인격과 현존을 담고 있으므로, 모든 언행에서 신성함을 지켜야 할 중대한 의무(grave obligation)로 여겨진다(CCC 2160).

 주일(主日, 일요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로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에 해당한다. 구약의 안식일(토요일)에 하느님을 예배하고 쉬던 전통을 신약 시대에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계승한 것이다(사도행전 20,7; 요한 20,1 참조, CCC 2174–2176항).

  이 계명은 주일과 의무 대축일에 미사에 참여하여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정당한 이유 없는 육체노동을 삼가며 휴식하라고 가르친다(CCC 2180–2185항). 주일 성수는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니라, 창조주께 드리는 예배와 구원 사건의 기억이며,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근본적 행위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인간이 창조주께 져야 할 의무이며, 동시에 인간 자신의 영적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다. 현대 사회는 바쁜 일정과 과로로 인해 주일 성수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지만, 교회는 가능하면 노동을 중단하고 가족과 함께 보내며 기도와 선행에 전념하도록 권고한다(CCC 2184–2186항).

  주일 성수는 곧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이웃과 공동체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휴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 안에서 주님을 기념하는 날”로서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CCC 2177 참조).

  이 계명은 가정과 사회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도덕적 명령이다. 단순히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으며, 가족 내 질서와 사회적 권위에 대한 존중까지 포함한다(CCC 2197항).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 감사, 순종의 의무를 지닌다(CCC 2214–2217항).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에 따른 의무이며, 부모가 자녀를 낳고 기른 사실 자체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도덕적 책임이다. 동시에 이 계명은 부모에게도 자녀에 대한 교육, 양육, 신앙 전수, 도덕적 모범의 책임을 상기시킨다(CCC 2221–2231항).

  교리서는 넓은 의미에서 제4계명이 “학생이 교사에게,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시민이 국가와 공권력에 대해 져야 할 의무”까지 포괄한다고 설명한다(CCC 2234항 이하). 이는 정당한 사회적·교회적 권위(예: 교사의 훈육, 합법적 정부의 법 등)에 대한 협조와 복종을 포함하며, 공동선을 위한 책임의식을 요구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계명은 세대 간의 이해와 존중, 그리고 가정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촉구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거나 직접 찾아 뵙는 작은 실천, 노부모 봉양, 자녀에게 건전한 윤리와 신앙을 가르치기 위한 노력 등은 이 계명의 구체적 실천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공동체적 의무의 표현이다.

  이 계명은 모든 인간 생명의 고유한 존엄성과 신성함을 선언한다. “살인하지 말라”(탈출 20,13)는 간결한 명령은 단순한 행위 금지를 넘어, 인간 생명을 시작부터 끝까지 보호하라는 도덕적 요청을 담고 있다(CCC 2258항).

  따라서 고의적인 살인은 물론, 낙태, 안락사, 자살 교사·방조 등 모든 형태의 생명 파괴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다(CCC 2270–2283항).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고한 생명을 해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고의적인 살인은 물론, 낙태, 안락사, 자살 교사·방조 등 모든 형태의 생명 파괴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다(CCC 2270–2283항).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고한 생명을 해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또한 이 계명은 단순히 물리적 살인만이 아니라, 사람을 정신적으로 학대하거나 상처 주는 언행, 타인에 대한 증오, 복수심, 극심한 분노 등도 그 정신에 반한다고 본다(CCC 2302–2303항). 분노를 품고 증오를 지속하는 것은 심리적 살인의 씨앗이 되며, 이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교회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의 열매이다”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사목 헌장」 Gaudium et Spes 78항)을 강조하며, 전쟁이나 분쟁 중에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력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 죄로 규정한다(CCC 2312–2314항).

  오늘날 우리는 테러, 총기폭력, 낙태 산업 등 생명을 위협하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럴수록 이 계명의 참뜻을 되새기며, 생명을 수호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사회 전반에 확립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이는 단순한 법적 질서가 아닌,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복음적 평화의 실현이다.

  이 계명은 혼인과 인간 성(性)에 관한 순결과 충실의 덕목을 요구한다. “간음하지 말라”(탈출 20,14)는 명령은 단지 기혼자의 간통만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부도덕한 성적 행위를 포괄한다(CCC 2336항).

  가톨릭 교리는 성이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부부가 서로를 전인격적으로 내어주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가르친다(CCC 2360–2363항). 따라서 혼인 밖의 성관계, 포르노 시청, 자위행위, 음란한 시선이나 상상, 성적 유희를 목적으로 한 표현 등은 이 계명의 정신에 어긋난다(CCC 2351–2356항).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음란물이 쉽게 노출되며, 정결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정결(chastity)을 단순한 금욕이 아닌 “성의 의미를 질서 있게 통합하는 도덕적 덕목”이며, 동시에 “성령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로 이해한다(CCC 2337–2345항).

  정결이란 육체적 순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과 의지의 순결, 타인을 존중하는 시선, 관계의 정직함을 아우르는 포괄적 윤리로,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계명은 현대의 성 윤리 혼란 속에서 사랑의 본질이 책임과 헌신을 동반한 전인적 자기 봉헌임을 일깨워 준다.

이 계명은 타인의 재산과 권리를 존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도둑질하지 말라”(탈출 20,15)는 금령은 단순한 절도 행위의 금지를 넘어서, 사회 정의와 경제 윤리 전반에 관한 원칙을 포함한다(CCC 2401항).

  가톨릭 교회는 제7계명을 단지 소극적 금지가 아닌, “정의와 사랑으로 이 세상의 재화를 관리하라”적극적 요청으로 해석한다(CCC 2402–2405항). 이 계명에 따라 절도, 사기, 횡령, 부당한 임금 체불, 부패, 뇌물, 고의적 가격 조작, 내부자 거래 등은 모두 금지되며, 이는 단순한 불법이 아니라 도덕적 죄악으로 간주된다(CCC 2409항).

  더 나아가 교회는 “모든 재화는 보편적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는 원칙에 따라, 재화의 사적 소유는 정당하지만 그 재화를 통해 사회 전체,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을 도모해야 할 의무가 따른다고 가르친다(CCC 2403–2406항). 이러한 청지기 정신은 현대의 극단적 자본주의, 사치, 낭비, 환경 파괴 등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제7계명은 경제활동 속 정의와 자비의 조화, 사회적 연대와 나눔의 실천을 촉구하며, 부유한 자의 사적 소유가 공동선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죄의 구조에 속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CCC 2443–2449항). 이는 특히 가난한 이웃과의 연대를 통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복음적 요청으로 이어진다.

  말과 진실에 관한 계명으로, 정직과 신뢰의 가치를 다룬다. 이 계명은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만, 넓게는 모든 형태의 거짓말과 진실 왜곡을 금한다. 여기에는 악의적 중상모략(calumny)이나 험담(detraction), 경솔한 판단(타인의 명예를 해칠 수 있는 무책임한 단정), 위증과 위선, 직업상의 비밀 누설 등이 포함된다.

  가톨릭 교리는 이 계명이 단순히 거짓을 피하라는 소극적 명령이 아니라,“진리를 증언하라”(CCC 2464)적극적 의무도 부과한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요한 18,37 참조), 그리스도인들도 필요할 때 신앙과 진리를 위해 증언하고 고백하는 용기가 요구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짜 뉴스나 왜곡된 정보가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을 떠올리면, 제8계명의 중요성이 더욱 실감된다. 우리는 언행에서 진실을 따르고, 타인의 명예를 존중하며, 거짓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마음의 의향에 관한 계명으로, 내면의 정결을 강조한다.
  이는 “간음하지 말라”는 제6계명과 관련되지만, 보다 내적인 욕망의 단계에서 죄를 경계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제9계명은 다른 이의 배우자에 대한 부당한 욕망은 물론, 모든 부정한 생각과 상상을 경계하도록 요구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2514–2519)는 이를 “마음의 정결”(purity of heart)이라 설명하며, 이는 시선, 상상, 감정, 그리고 의지의 영역까지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정결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열매이며,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기도와 수덕으로 협력해야 하는 은총의 응답”(CCC 2520)이라고 강조한다.

  현대 문화는 성적 자극이 넘쳐나기 때문에 마음의 순결을 지키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마음의 문을 지키는 노력, 이를테면 유해한 미디어를 피하고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부정한 생각이 떠오를 때 이를 즉시 떨쳐 버리도록 기도하고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 계명은 우리에게 죄악은 마음에서 시작됨을 상기시키며, 생각과 욕망의 단계에서부터 자신을 단련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단지 권고가 아닌, 중대한 도덕적 의무(grave obligation)에 해당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계명은 욕심과 시기의 죄를 다룬다. 이는 제7계명(도둑질 금지)과 연결되어 있는데, 제7계명이 행위의 측면이라면 제10계명은 마음의 태도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탐내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집착하여 부러워하거나 그것을 빼앗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2534–2540)는 이 계명에 대해, “탐욕은 하느님보다 피조물을 우선시하는 죄이며, 은총에 반하는 내적 불질서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또한 Veritatis Splendor(진리의 광채, 1993,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내면의 의도와 갈망이 외적 행위의 도덕성을 결정짓는다”고 하여 이 계명의 내면성에 무게를 싣는다.

  질투와 탐욕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사회 정의를 해치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주의와 비교 의식이 사람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탐욕의 불씨를 지피곤 한다. 제10계명은 이에 맞서 만족과 감사의 덕을 기르라고 가르친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물질적인 부를 나눔과 선행의 수단으로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양심의 소리로 단호히 거절하고, 사회 구조적으로도 약자를 착취하는 경제 시스템에 맞서 공정성과 연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물질적인 부를 나눔과 선행의 수단으로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을 양심의 소리로 단호히 거절하고, 사회 구조적으로도 약자를 착취하는 경제 시스템에 맞서 공정성과 연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 계명은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닌, 하느님의 계명으로서 신자 각자에게 의무로 부과된 최소 도덕 기준, 즉 “하한선”에 해당한다(CCC 2072 참조).

  위에서 살펴본 각 계명의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십계명 각 조항의 핵심 교리와 내용 요약

계명 번호계명 구절핵심 교리 의미 및 윤리적 요구사항주요 교회 문헌 인용
제1계명“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유일하신 하느님만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할 것. 우상숭배, 미신, 점술, 마술, 사탄숭배, 신성 모독, 무신론을 피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경배.CCC 2084–2132
제2계명“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존경. 거짓 맹세, 신성 모독, 하느님의 이름으로 악행을 정당화하는 행위 금지.CCC 2142–2167
제3계명“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주일(주님의 날)과 의무 축일 성수. 미사 참여, 휴식, 자선, 가족과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CCC 2168–2195
제4계명“부모에게 효도하여라.”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 자녀 양육의 책임, 사회 질서 존중(교사·국가 권위 포함).CCC 2197–2257
제5계명“사람을 죽이지 마라.”생명의 존엄성 수호. 살인, 낙태, 안락사, 자살 방조, 폭력, 증오, 복수 금지. 평화와 용서, 생명 존중 문화 확립.CCC 2258–2330
제6계명“간음하지 마라.”혼인과 성의 순결. 간통, 음란물, 자위행위, 부정한 성적 행위 금지. 정결의 덕 실천.CCC 2331–2400
제7계명“도둑질을 하지 마라.”재화의 정의로운 사용. 절도, 사기, 부패, 임금 착취, 불공정 경제 구조 반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나눔은 의무.CCC 2401–2463
제8계명“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진실의 증언. 거짓말, 중상모략, 험담, 명예훼손, 비밀 누설 금지. 신앙의 고백과 언행의 일치.CCC 2464–2513
제9계명“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마음의 정결. 성적 욕망의 통제, 부정한 상상·생각 절제. 정결한 삶을 위한 의지적 노력 강조.CCC 2514–2527
제10계명“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탐욕과 질투의 절제. 물질주의 극복, 감사와 만족의 덕 실천, 공정한 분배 추구.CCC 2534–2557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법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진리의 광채」를 중심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 1993)에서 현대 도덕신학의 근본 문제들을 다루며, 특히 도덕적 진리와 인간 자유, 양심, 하느님 법의 관계를 깊이 있게 성찰하였다. 이 회칙은 현대에 퍼진 도덕적 상대주의와 상황윤리에 대한 교회의 응답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유효한 보편적 도덕 진리의 존재를 역설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법 사이에는 참된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참 자유를 보존하고 완성하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그 역동성 안에서 상한선은 없지만 하한선은 있다”고 하며, 사랑의 계명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하한선이 바로 십계명과 같은 부정 명령들의 준수임을 분명히 했다(Veritatis Splendor 52항 참조). 예컨대 이웃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그 이웃을 해치는 거짓이나 불의를 행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의 계명을 저버린 것이 된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는 행위”들이 존재하며, “특정 행위는 어떤 의도나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양립할 수 없다”는 교리를 교황은 재천명한다(Veritatis Splendor 80항, CCC 1756항). 예를 들어, 목적이 선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악한 행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는 가톨릭 윤리의 핵심 원칙 중 하나이며, 교회는 이러한 ‘예외 없는 도덕률’을 오랜 전통 안에서 일관되게 가르쳐 왔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교회는 언제나 부정 형태의 도덕 계명들이 예외 없이 모든 이를 영원히 구속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상기시킨다(마태 19,17–18). 이는 근래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한 “근본 선택(Fundamental Option)”이나 “비례주의(Proportionalism)”, “상황윤리(Situation Ethics)”, “결과론(Consequentialism)” 등의 접근이 십계명의 보편타당성을 훼손하는 오류임을 분명히 지적한 대목으로 해석된다.

  정리하면, 교회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십계명을 어기는 어떤 행위도 참된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최소한 십계명이 금하는 악을 피함으로써 그 진정성을 드러낸다고 가르친다(Veritatis Splendor 52항, CCC 1789항 참조). 그리고 이러한 계명 준수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악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지켜주는 보호선임을 강조한다. “진리는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복음 말씀처럼, 십계명의 진리를 따를 때 오히려 인간은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교회의 확신이다.

양심의 성찰과 형성 – 십계명의 역할

  가톨릭 교리는 양심을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자 성소(聖所)”로 묘사하며, 그곳에서 인간은 혼자 하느님과 대면한다고 가르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CC] 1776항 참조). 양심은 인간이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하느님의 뜻에 합치하는지를 내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양심의 올바른 판단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CCC 1778항). 하지만 양심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특히 스스로의 잘못, 즉 무지, 게으름, 죄의 습관 등에 의해 양심이 둔감해지면,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위험이 있다(CCC 1790–1791항).

  따라서 양심의 올바른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톨릭 신자는 교회의 확실한 가르침에 따라 양심을 형성해야 하며, 성경 말씀과 교리, 기도와 영적 지도를 통해 양심을 계몽해야 한다(CCC 1783–1785항). 이때 십계명은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자 빛이 된다. 십계명 각각을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양심 성찰(Examinatio Conscientiae)은 전통적으로 신앙인들이 고해성사 전후에 실천해 온 유익한 영성 훈련이다.

  예를 들어, 제1계명을 두고 “내 삶의 최고 자리에 하느님을 모셨는가? 돈이나 세속적 성취를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았는가?”, 제5계명을 두고 “말이나 행동으로 이웃의 생명과 존엄을 해친 적은 없는가?” 등을 반성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문답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회개와 쇄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다음은 십계명에 따른 대표적인 양심 성찰 질문들이다.

십계명에 따른 양심 성찰 예시 질문

십계명 조항양심 성찰을 위한 질문 예시
제1계명“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내 삶의 최고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가? 다른 무엇(돈, 명예, 쾌락 등)이 하느님보다 앞서 있지는 않은가?– 미신이나 운세 보기 등에 의존하지 않았는가? 하느님보다 점이나 사주팔자 등을 더 믿지는 않았는가?– 신앙생활에서 냉담하거나 하느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가?
제2계명“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하느님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고 부른 적은 없는가? 화를 내거나 놀랄 때 하느님의 이름을 욕설처럼 내뱉지는 않았는가?– 거짓 맹세를 하거나 “하느님을 두고 맹세코…”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는가?– 성스러운 것을 농담거리로 삼거나 경박하게 대우하지 않았는가?
제3계명“주일을 거룩히 지내라.”주일미사에 충실히 참여하고 있는가? 특별한 사유 없이 미사를 빼먹은 적은 없는가?– 주일을 세속적인 일만 하며 보내지 않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기도와 선행으로 보내려 노력했는가?– 주일에 꼭 필요하지 않은 쇼핑이나 과도한 업무로 하루를 분주히 보내 버리지는 않았는가?
제4계명“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모님께 존경과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가? 부모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자세를 취했는가?– 가정에서뿐 아니라 학교나 직장, 사회에서 권위자(교사, 상사, 공직자 등)를 정당하게 존중했는가?– 부모로서 자녀에게 신앙과 덕을 가르치고 좋은 본을 보였는가? 자녀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누었는가?
제5계명“사람을 죽이지 마라.”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누구를 해친 적은 없는가? 폭언이나 폭행, 왕따 등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 낙태를 시도하거나 동의한 적은 없는가? 안락사를 지지하거나 찬성하지는 않았는가?– 자신의 몸을 소중히 돌보고 있는가? 무절제나 중독(술, 담배, 마약 등)으로 건강을 해치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에 대한 분노나 증오, 복수심을 품고 있지는 않은가?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오래 악감정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은가?
제6계명“간음하지 마라.”– 부부로서 배우자에게 충실하고 정직한가? 다른 이성에게 부적절한 관심이나 애정을 두지는 않았는가?– 혼전순결을 지키고 있는가? 혼인 밖의 성관계나 부도덕한 성행위를 한 적은 없는가?– 음란물을 보거나 자위행위 등으로 순결을 어긴 적은 없는가? 성(性)을 장난스럽게 다루거나 음담패설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는가?
제7계명“도둑질을 하지 마라.”남의 물건을 무단으로 사용하거나 가져온 적은 없는가? 빌린 것은 제때 돌려주고 있는가?– 회사나 조직의 돈과 자산을 정직하게 다루고 있는가? 업무시간에 꾸벅꾸벅 졸거나 딴짓하며 “시간 도둑”질을 하지는 않았는가?–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거나 받지 않은 일이 있는가? 상거래에서 부당 이득을 취한 적은 없는가?– 세금이나 공과금을 고의로 포탈한 적은 없는가?
제8계명“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거짓말을 한 적은 없는가? 특히 타인에게 피해를 준 심각한 거짓말은 없었는가?–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이나 소문을 퍼뜨린 적은 없는가? 사실 확인 없이 경솔히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난하지는 않았는가?– 약속한 비밀을 지키지 않고 누설한 적은 없는가? 직업 윤리에 따라 지켜야 할 기밀을 어기지 않았는가?–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고 신앙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았는가? 필요한 순간에 신앙을 증언하기를 회피하지는 않았는가?
제9계명“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다른 사람의 배우자나 연인을 부러워하거나 탐한 적은 없는가? 그로 인해 내 관계에 소홀해지지는 않았는가?– 부적절한 포르노나 연애소설 등에 심취하여 마음의 순결을 해친 적은 없는가? 내 행동이나 옷차림으로 타인에게 성적 유혹이 되지는 않았는가?
제10계명“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주변 사람들이 가진 부나 재능을 과도하게 질투하지는 않았는가? 시기심에 그들을 폄하하거나 불의한 방법으로 따라잡으려 한 적은 없는가?– 돈이나 물질에 대해 지나친 집착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더, 더”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현재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부나 자선을 통해 가진 것을 나눈 적이 있는가? 너무 이기적으로 축적하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위와 같은 양심 성찰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죄와 약점을 깨닫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덕을 쌓고 죄악을 멀리하는 영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십계명은 우리의 양심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도덕 교사이며, 이를 통해 양심이 바른길로 형성되고 유지될 때 인간은 참된 행복과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십계명과 가톨릭 사회 교리 – 현대 사회를 위한 도덕 지침

  십계명은 개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 사회 윤리와 공동선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이 함축하는 이웃 사랑의 정신을 발전시켜 체계화한 것이 바로 가톨릭 사회 교리라고 가르친다. 가톨릭 사회 교리의 핵심 원리들 -인간 존엄성, 공동선, 연대성, 보조성 등- 은 모두 십계명의 정신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계명은 개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 사회 윤리와 공동선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이 함축하는 이웃 사랑의 정신을 발전시켜 체계화한 것이 바로 가톨릭 사회 교리라고 가르친다. 가톨릭 사회 교리의 핵심 원리들 -인간 존엄성, 공동선, 연대성, 보조성 등- 은 모두 십계명의 정신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제7계명과 제10계명에서 강조되는 재물에 대한 바른 태도는, 사회 교리의 재화의 보편적 목적사회 정의 개념으로 확장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제69항은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의 사용을 위해 마련하셨다”고 선언한다. 이는 모든 경제 활동과 재산 제도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지향해야 함을 뜻한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극단적인 빈부 격차와 구조적 가난은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죄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부유한 개인이나 국가는 자신의 부를 독점하거나 가난한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이는 제7계명과 제10계명의 정신에 반하는 행위이자 사회적 죄악으로 여겨진다. 교회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의로운 분배 구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등의 원칙을 제시한다(참조: 「가톨릭 사회 교리 요약」 182항 이하).

  또한 제5계명은 사회 교리의 평화론과 밀접히 연결된다. 「기쁨과 희망」 제78항에서 공의회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실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이는 국제 관계에서 단지 힘의 균형이나 군비 경쟁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으며, 국제적 정의와 상호 신뢰를 구축해야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민족 간 화해와 용서, 빈곤과 불의를 해소하는 노력은 곧 평화를 위한 노력이며, 교회는 이를 위해 활동한다. 아울러 교회는 무분별한 폭력과 테러, 대량살상무기의 사용 등을 단호히 반대하며,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5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현대 사회에서 무고한 생명을 해치는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회 윤리적 원칙으로 확장된다.

  제8계명 역시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 윤리적 함의를 지닌다. 정보화 시대에서 진실과 투명성은 사회의 건강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거짓 뉴스, 왜곡된 선전, 부패와 은폐는 공동체의 신뢰를 붕괴시킨다. 따라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언론 윤리, 공직자의 도덕성, 투명한 기업 경영 등 다양한 사회 분야에서 진실성과 책임성을 요구하는 원리로 작용한다. 정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제도와 구조 또한 진리를 추구해야 하며, 교회는 이에 목소리를 내며 사회의 양심으로서 역할을 하려 한다.

  요약하면,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통해 개인의 성화를 도모할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고자 한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십계명의 윤리적 토대를 바탕으로 현대의 복잡한 문제들 – 경제 정의, 인권, 평화, 환경 등 – 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세상의 누룩”으로서 복음 정신을 확산하고자 한다. 십계명의 보편 윤리가 개인의 마음에서 가정과 사회, 국가와 국제 질서에까지 스며들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이루어질 것이다.

결론

  가톨릭 교회의 교리적 관점에서 볼 때, 십계명은 단순한 도덕률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룩한 계약의 일부이며,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지침이다. 십계명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완전한 도덕 규범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 안에서 통합된다. 결국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계명의 중요성은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퇴색되지 않는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는 모든 진리를 상대화하고, 도덕 기준을 개인화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에서 표현된 보편적 도덕 진리를 굳게 지키며 선포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는 흐려진 도덕적 통찰을,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분명히 밝혀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를 초월하여 누구나 십계명에서 인간다움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문명이 이와 유사한 윤리 규범을 핵심 가치로 삼아왔다.

  물론 십계명을 지키는 일은 인간의 약함 때문에 때때로 어려움을 수반한다. 하지만 교회는 성사 생활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믿는다. 특별히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새 법을 새겨 주시어(예레 31:33 참조), 문자로서의 계명이 아닌 영으로서의 계명, 곧 사랑의 법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렇게 될 때, 계명 준수는 더 이상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내적인 기쁨과 자유의 행위가 된다.

  결론적으로, 십계명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십계명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며,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지혜의 말씀이다. 십계명을 통해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는 길을 배우고,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삶을 사는 방법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 나아가 모든 양심적 인간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는 열쇠라 할 것이다.

  십계명의 계율 하나하나는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다른 모습”이며, 이를 지킬 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본연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게 된다. 우리 각자가 십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살아낼 때, 개인과 가정, 사회와 세계는 조금씩 하느님의 빛과 진리가 비추는 새로운 세상으로 변모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궁극적 이유이며, 교회가 오늘도 십계명을 가르치는 목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