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설명

성 정하상 바오로 (Chong Hasang Paul)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신도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한 학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순교자 유소사 체칠리아의 아들이며,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고 집안이 몰락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큰 고난을 겪었으나,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굳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박해로 인해 성직자 없이 흩어진 조선 교회의 재건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당시 조선 교회는 외부와의 소통이 끊겨 있었고, 신자들은 구심점을 잃은 상태였다. 정하상은 이 비극적인 상황을 타개하고자 성직자 영입 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1816년부터 아홉 차례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실상을 알리고 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의 끈질긴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을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조선 교회가 비로소 보편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정하상은 성직자들을 맞이하고 보필하며 교회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조선에 입국한 사제들의 복사 역할을 하며 그들의 사목 활동을 도왔고, 김대건을 비롯한 신학생들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보내는 일에도 관여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의연하게 관청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옥에 갇힌 그는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저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천주교의 교리가 결코 국가의 질서를 해치는 사학(邪學)이 아니며, 오히려 임금과 부모를 공경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게 하는 참된 가르침임을 논리정연하게 변호했다. 《상재상서》는 그의 깊은 신학적 통찰과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보여주는 한국 천주교회의 귀중한 문헌으로 남아있다.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배교를 거부했다.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의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와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 역시 그의 뒤를 이어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함께 9월 20일 대축일의 주인공으로 공경받으며, 한국 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위대한 신앙의 선조로 기억되고 있다.

연대기

1795년: 경기도 양근(현 마재 성지)에서 출생.

1801년: 신유박해로 부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순교하고 가세가 몰락함.

1816년: 조선 교회 재건을 위해 처음으로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 파견을 요청함.

1825년: 교황 레오 12세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조선대목구 설정을 청원함.

1831년 9월 9일: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대목구를 설정함.

1839년 7월: 기해박해가 발발하자 체포되어 옥중에서 《상재상서》를 집필함.

1839년 9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함.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됨.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과 함께 시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