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
📖 관련 성경 구절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요한 19,2-3)
병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조롱하며 머리에는 가시로 된 관을 씌우고 몸에는 누더기 같은 자주색 겉옷을 걸쳤습니다.
🕊 교의적 배경
가시관은 인류의 죄로 인한 고통과 조롱의 상징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범죄한 후 땅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창세 3,18).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바로 죄의 저주를 친히 뒤집어쓰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부들은 “아담의 죄로 돋아난 가시를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이마에 쓰심으로써, 우리 죄의 가시를 뽑아내셨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조롱과 모욕은 그분의 겸손과 온유를 극명히 드러냅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예언했고(이사 53,7),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이 가시관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세상의 권력과 완전히 다름을 배웁니다.
인간 군주는 화려한 황금 왕관을 쓰지만, 우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가시로 된 왕관을 쓰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받으신 가시관과 자주색 조롱 옷을 두고 “보라, 이 사람이오!”(요한 19,5)라는 말로 묘사합니다.
“보라, 사람이다!” 조롱 섞인 이 말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곧 사랑과 진리를 위해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 남이 아닌 자신이 희생함으로써 악을 이겨내는 사람이 참 인간이라는 진리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은 동시에 영광의 관으로 변화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 없이 부활의 영광도 없음을 가르치기에, 십자가와 부활을 파스카 신비로 항상 함께 묵상합니다. “우리는 가시관을 쓰신 임금 없이는 영광의 왕관도 없다”는 진리는 가톨릭 신앙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랐을 때, 성 요한 묵시록은 그분의 머리에 “많은 관들”이 씌워져 있음을 봅니다(묵시 19,12). 이는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높임받으셨음을 상징합니다 (필리 2,8-9 참조).
가시관의 굴욕은 곧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 속죄와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뀐 것입니다.
🔍 깊이 있는 묵상을 위한 안내
조롱과 모욕 속에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음에 그려 봅시다. 머리를 찌르는 가시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에는 원망이나 분노가 아닌 자비의 눈물이 맺혀 있었을지 모릅니다.
군중은 “유다인의 왕”이라며 비웃었지만, 사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참된 왕이심을 선언하는 역설적 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모욕의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왕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는 사랑의 왕,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낮추시는 섬김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작은 모욕이나 비난에도 쉽게 분노하고 맞서 싸우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교만과 분노를 내려놓아 봅시다. 주님은 침 뱉음과 뺨 맞음까지 당하시면서도 “폭행을 당하셨으나 참으셨고, 입을 열지 않으셨다”(이사 53,7)는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깊은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것은 오직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 너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치욕도 달게 받겠다.” 예수님의 침묵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 때문에 세상에서 조롱받거나 오해받을 때가 있습니다. 또는 억울한 비난을 받을 때도 있고, 선을 행하고도 오히려 손가락질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시관 쓰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과 함께 멸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광임을 깨달으십시오.
성인들은 종종 “모욕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고, 오히려 굴욕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삶에서 찾아오는 크고 작은 굴욕을 피하기만 하지 말고, 때로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기꺼이 모욕을 참아내는 용기를 달라고 청합시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천상의 평화와 겸손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 묵상을 돕는 기도
주님, 온갖 모욕과 수치를 참아 내신 임금이시여, 제가 교만과 허영의 왕관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가시관을 쓸 용기를 주소서. 세상 영광을 좇기보다는 겸손의 길을 걸으며, 모욕 중에도 침묵하신 주님을 본받아 제 작은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제가 받는 상처와 비난을 제 영혼을 정화하는 가시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주님께서 받으신 가시관의 아픔을 기억하며, 다른 이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삼가게 하시고 언제나 겸손과 온유의 왕이신 주님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성인의 말씀 및 신앙의 모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세상 왕후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주님께서 가시관을 쓰셨는데 내가 어찌 금관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 가시관을 쓰셨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세속적 영광을 멀리했습니다.
성녀는 남편을 여읜 뒤 궁궐을 떠나 가난한 이들 속에서 봉사하며 살았는데, 이는 가시관의 주님을 따른 삶의 한 예입니다. 또한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야, 사람들이 너를 업신여기고 미워하며 쫓아낼 때 기뻐하여라. 그때 비로소 너는 나와 함께 왕관을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가시관을 썼고 너는 생명의 관을 쓰게 되리라.”
이 일화에서 보듯, 성인들은 세상에서의 굴욕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높임받는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성 바실리오는 “모욕은 겸손의 훈련”이라고 가르쳤고, 성 베르나르도는 “겸손의 길 없이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도 성인들의 가르침처럼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때때로 찾아오는 가시관을 달게 받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낮출 때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며, 예수님과 함께 받을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희망합시다.